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(문단 편집) === 가계도 === 콘라트의 집안은 대대로 [[모라비아 변경백국|모라비아]]의 [[브르노|브륀]]에서 [[군인]]과 [[공무원]]을 업으로 삼았었다. 콘라트의 [[증조부]] 프란츠 안톤 콘라트(Franz Anton Conrad, 1738 ~ 1827)는 모라비아와 [[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|슐레지엔]]의 지방 회계 감사원이었다. 프란츠 안톤 콘라트는 50년동안 합스부르크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[[1815년]]에 [[오스트리아 제국]]의 초대 황제인 [[프란츠 1세]]로부터 세습기사 작위를 부여받았고, 세습 귀족이 되면서 [[바이에른 선제후국]] 출신이었던 아내 요제파 폰 회첸도르프(Josefa von Hötzendorf, 1739 ~ 1798)[* 콘라트의 증조모]의 성을 합쳐서 “콘라트 폰 회첸도르프”로 성씨를 정하였다. 콘라트의 [[조부]] 요제프 오이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(Josef Eugen Conrad von Hötzendorf, 1768 ~ 1837)는 모라비아 잘름(Salm) 가문의 재산 관리자였다. 오이겐의 아내 바바라 포스타베크(Barbara Postavek)는 콘라트의 조상 중에서 유일한 비(非) 독일인이었다. 프란츠 안톤 콘라트의 손자이자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의 아버지인 프란츠 크사버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(Franz Xaver Conrad von Hötzendorf, 1793 ~ 1878)는 20세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하여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#s-5.1.1|오스트리아 제국군 황립 용기병 연대 소속]] [[중위]]로 [[라이프치히 전투]]에 참전하였다. 이후 [[1817년]]부터 헝가리와 갈리치아 일대에서 [[후사르]]로 복무하였는데, 30년동안 복무를 했지만 [[중령]]에서 더이상 진급을 못하였다. [[1848년 혁명|빈에서 일어난 헝가리인의 봉기]]를 진압하던중 낙마를 하여 골반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최종 계급 [[후사르]] [[대령]]으로 퇴역하였다. 이후 크사버는 [[환갑]]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국의 수도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에 정착하였고 크사버보다 32살이나 어렸던 바바라 퀴블러(Barbara Kübler, 1825 ~ 1915)를 만나 결혼을 한다. 그 후 1년이 지나서 첫 자식을 낳았는데, 그가 바로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